친애하는 이상하고 귀여운 감독님께.
학문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한창 무르익었던 늦여름의 어느 날이었어요. 처음 방문하게 된 영화제에서 당신 영화를 처음 봤죠. 제목은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캄캄한 극장에서 멍하니 보낸 시간들은 이제 휘발됐지만, 유난히 빛나는 화면 속 하얀 옷을 입은 여성들이 들려주던 노래는 어렴풋이 기억나요. 딱 들어맞지도 틀어지지도 않은 아카펠라의 화음들.
그 첫인상은 몇몇의 이야기를 거쳐 곧 ‘바르다의 것’이 되어버렸죠.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에 심심찮게 당신 얼굴을 떠올리게 됐고요. 그럼에도 내심 궁금했답니다. 매번 극장을 나서고 화면을 끄고 나서야 분명해지는데도 왜 좋은 걸까. 어떤 마음으로 찍었을 때 저런 영화들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오묘한 빛깔의 버섯 머릿속에는 얼마만큼의 탐스러운 생각들이 들어있었을까.
그래서 켜졌다가 꺼졌다가, 연신 바뀌는 초점으로 그 답을 찾아가 보려 해요. 철썩철썩,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들고 나오는 이곳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에서 말이죠.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한 의미들이 애써 붙잡은 흔적일지라도. 언제든 다시 쓸 수 있는 고운 모래사장은 남아 있을 테니까요.
네모난 거울, 바닥에 깔린 거울, 긴 거울, 들 수 있는 작은 거울. 사람들을 둘러싼 빛의 산란장에서 한바탕의 회고가 펼쳐집니다. 요리조리 튕기고 흡수되고 반사되는 당신의 역사와 작품과 그 뒷얘기가 마치 끝말잇기 같아요. 끊일 듯 끊이지 않는 파편들. 여기에 저의 제시어도 살짝 놓아볼까요. 처음 떠오른 건, 아름다움이에요.
당신의 미감을 쫓아가는 건 더없이 재밌죠. 그동안의 촬영과 편집 중에 묻어난 감각들을 보고 배운 것들로 연관 지을 수 있었어요. 보들레르, 릴케, 프레베르, 브라상, 피카소 그리고 바슐라르. 이 이름들에서는 초현실주의와 물질성에 대한 애정을 느꼈고,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이 취향은 콜라주 혹은 미장아빔의 활용으로 이어졌을 테죠. 보지라르 학교부터 맺은 사진과의 인연은 현장감 넘치는 포착을 원하게 하고요.
현대미술과 미디어 아트를 떠오르게 하는 그 인장들은 이번에도 곳곳에 있어요. 화면 내 배경과 분리되거나 장면 간의 연결에서 튀는 이미지들은 영화의 매끄러운 봉합을 방해해요.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깨뜨리진 않죠. 연출로 불러온 멀고 가까운 기억들은 전시되며 생명력을 얻어요. 눈앞에서 버젓이 재현되면서요. 몇 번이나 매만졌을 이미지와 소리들은 낯설고도 신비로운 감정을 자아내죠.
꽃과 조개껍질로 꾸민 고양이 구구의 묘, 항구의 붙박이 배 위와 학교 다닐 때의 놀이들, 서커스 단원이라는 장래 희망, 노란 돛단배의 거슬러 오름, 옛 강의로부터 비롯된 시체 놀이, 아비뇽 페스티벌을 소환한 사진들, 좁은 골목에 주차되던 QV와 비를 뚫고 등장한 새들, 쿵푸를 하며 뒷걸음 쳐보는 순간과 자크 드미로 물결치는 시간, 수많은 필름으로 완성한 집과 빗자루와 함께 반복되는 바르다 당신까지.
그 자유롭고 환상적인 결합들이 좋아서 몇몇 장면들은 수집해 봤어요.
보다 보니 비현실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아닌가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볼 수 있죠. 사실은 당신의 현실을 지나왔다는 걸.
어린 시절에서 영감을 받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듯 바르다 씨도 추억과 제법 긴밀한 관계를 맺었더군요. 카지노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브뤼셀에서 들은 엄마의 한마디,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 유대인의 사정, 라 푸앵트 쿠르트에서의 생활과 센 강둑 아래서 예술 책을 읽던 순간 등. 모두 전작들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발견되었죠.
작품 자체도 그래요. 당신의 작품은 후대들이 부르기 쉽게 분류한 기준을 넘나들어요. 당대 감독들과 영화계의 ‘새로운 물결(New Wave)’ 중에 있는가 하면, 혁명 중인 중국과 쿠바에 홀로 넘어가 역동적인 삶을 찍는 사진작가로 활발히 임했죠. 알제리 전쟁의 장병이 겪는 공포나 권리를 보장받고 싶은 여성들, 블랙팬서의 활동이나 히피 문화의 단면을 영화에 담기도 하고요.
어떤 상황을 정죄하거나 감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서 논할 여지를 주는 것. 전쟁을 경고하며 십자가로 오마주하거나 걸어 다니는 감자로 몸소 분했던 것처럼, 필요할 때는 기꺼이 움직이는 것. 저는 그것이 당신이 품은 정치성이라 생각해요. 지금 있는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전투가 아닌 노래를, 담론이 아닌 질문을 시작해 더 많은 의견과 생각들을 불러 모았죠.
얼마나 낭만적인지. 명예는 내려놓고 돈에 치이다가도 이내 상상을 이어가던 낙관도 그렇고. 블레즈와 뱅상이 아버지를 만나러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회나, 고향집에서의 낯선 기차광과 인터뷰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통통한 수다쟁이”가 주인공인 영화마저 사랑하는 존재들로 가득 채워버리는 다정함도 그렇고.
또 자신이 아닌 인물로 자기를 표현하는 일. 스스로를 등장인물이자 감독, 개인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동시에 위치시키는 일. 픽션 속에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일. 붙잡을 수 없는 가치들에 더없이 밀착하는 일. 이해할 수 없지만 계속 다가가려는 일. 그 모순들에 흔쾌히 뛰어들어 카메라를 통해 끊임없이 나와 타자와의 만남을 갈망하는 일 모두 낭만적이에요.
이전에 말한 적 있었죠, 영화 쓰기(cinécriture, cinewriting)에 대해서. “시네크리튀르는 시나리오가 아니에요. 영화를 위한 탐사, 선택, 영감, 작성한 텍스트, 촬영, 편집 등 모든 것의 앙상블이죠. 영화는 이 모든 다양한 순간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내는 결과물이에요.” 회고를 위해 선택한 기억, 그것의 묘사와 나열, 그것들을 연결 짓는 태도를 지켜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름답고 현실적인, 그리고 낭만적인 당신의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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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이런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죠.
드라마도 없고, 사건도 없고, 범죄도 없고, 총도 없고, 정치도 없는 영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아녜스 바르다의 말』 p.401.
그래서요, 바르다 씨. 개론도 아니고 총론은 더더욱 아닌 이 이상한 다시-쓰기를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도 종종 당신의 작품을 찾게 되고 그 안에 깃든 마음을 만나고 싶어질 거라는 거예요. 표현하기에 용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 몽상가로 먼저 살아본 그 길을 존경하는 마음에서요.
또 언제나 풍경을 해친다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제가. 가끔은 있는 정 없는 정도 끊어버리고 세상과 단절하고 싶은 제가, 마지막으로 찾을 수 있는 따뜻함이 당신께 있거든요.
그리고 그냥, 솔직히 그냥요. 살다 보면 바르다의 영화가 그리워질 때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