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엔걸 스즈코, 🍑 쉼표, 도돌이표, 그리고 마침표 🍑

🍑 쉼표, 도돌이표, 그리고 마침표 🍑

타나다 유키, 백만엔걸 스즈코

누나에게.

 

잘 지내? 얼마 전에 내 책상에 꽃병이 놓여 있었어. 너무 화가 나서 그 꽃병을 깨 버렸거든. 그리고 장난을 친 녀석들과 싸우게 됐는데, 한 녀석이 다치는 바람에 나는 ‘아동상담소’라는 곳에 보내졌어. 상처를 입힌 건 나쁜 짓이라 그 애한테 사과했지만 용서해주지 않을 거래.

 

누나,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다치게 한 건 나쁘지만 말이야. 아빠, 엄마는 전학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전에 봤던 누나 모습을 생각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그러니까 이대로 모두와 같은 중학교에 가려고 해. 시험은 안 칠 거야. 누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도록 노력할게.

 

누나. 아빠, 엄마가 걱정 많이 해. 가끔은 전화 좀 해줘.

 

– 타쿠야.

배움의 공간이 폭력으로 물든 일상을 버티던 타쿠야는 떠올린다. ‘전과자’ 꼬리표를 비아냥거리던 동창들에게 악바리로 맞서 싸우던 누나를. 어쩐지 모난 형태로만 튀어나오는 제 말에도 ‘자신은 창피한 짓 한 적 없다’고 답하던 의연함을. 옷자락을 쥔 제 손을 끌어와 맞잡던 그 손의 온기를.

 

수감 번호 325번, 이웃 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통’의 인물에 불과한 사토 스즈코. 영화는 그가 전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 후 유별난 규칙을 세워 타지 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규칙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백만 엔이 모이면 살던 곳을 떠난다.” 백만 엔은 그가 홧김에 버린 검은 가방에 들어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금액이자, 임시 거처와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선이다.

 

스즈코가 전과자로 낙인찍히는 과정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함께 독립하기로 약속했던 리코는 갑자기 애인과 같이 살자더니, 정작 이삿날에는 리코의 전 남자친구로 전락한 타케시만 보일 뿐이고. 그는 스즈코가 구조한 고양이를 버렸다며 당당하게 읊고 있으니, 짐이라도 갖다버리고 싶을 만큼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구나 기물손괴죄로 체포된 상황에서 경찰은 타케시와의 잠자리 경험 유무를 물으며 회유하고, 법원은 “막 실연한 피해자의 심정”을 고려해 벌금 선고를 내리니. 참으로 스즈코의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삶, 그 잘못이 부풀려 낙인이 되는 삶, 그 낙인을 내면화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민폐로 규정짓는 삶. 전문대 졸업 후에도 번듯한 직장 하나 얻지 못해 매달 부모님께 생활비를 내던 스즈코에게 ‘전과자’라는 타이틀은 추방 선고와 다름없다. 도쿄에서 친구 하나 없이 외딴섬처럼 살던 그에게 집이라는 작은 섬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기에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떠나 외톨이 철새를 자처하는 스즈코의 선택은 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백만 엔’ 역시 단순히 물리적 생존을 위한 금액 이상으로, ‘귀찮은 일에 휘말려 상처받는 일’ 없이 적절한 순간에 떠나기 위한 명분인 셈이다.

어느 해변 가게에서부터 복숭아 과수원을 거쳐 원예 코너에 이르기까지, 스즈코의 철새-살이는 매 순간이 도전이다. 임시 거처와 일자리 구하기,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기, 은연히 발생하는 불안함과 불편함을 감내하기. 그는 아침 일찍부터 녹초가 될 정도로 일하며 삶의 활력을 얻기도, 빙수 제조나 복숭아 따기와 같은 비범한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름조차 모르는 이에게 소울메이트라며 고백받거나, 젊고 귀여운 아가씨라는 이유로 복숭아 홍보를 강요당하는 일도 있다. 잇따르는 호의로 포장된 폭력적인 상황에 떠돌이 여성이 겪는 두려움의 순간까지. 결국 어린 외톨이 철새는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그렇게 도착한 도심 근교, 그곳에서 만난 료헤이와의 인연. 항상 깊은 관계를 맺지 않던 스즈코지만 제 경멸에 못 이겨 도망치는 자신을 끈질기게 붙잡는 료헤이에게 곁을 내줘본다. 늘 급작스럽거나 애매한 맺음으로 끝내던 과거와 달리,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름의 발화로 관계를 매듭지어보기도 한다. 달아나지 않고 그 끝과 마주하기. 타쿠야의 편지 덕분에 도망이 아닌 대항을 택한 그날처럼 언제부터인가 작아져버린 용기를 다시 꺼내는 스즈코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완성하는 세 번째 임시 거처에서의 매듭짓기.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걸던 커튼을 처음으로 걷어 본다. 사회적 편견, 자기혐오, 자기 은폐로 늘 무언가를 삼켜냈지만, 이번에는 있는 힘껏 울음도 터뜨린다. 새어 나오는 눈물에도 묵묵히 칫솔과 옷가지를 챙기다 보니 어느새 해는 뜬다. 떠나기 전 으레 그랬듯 동생에게 쓴 편지를 부치고, 료헤이에게 마지막 인사도 건넨다. 여느 멜로드라마 마냥 옛 연인과의 극적인 재회가 아닌, 캐리어를 들고 후련하게 떠나는 엔딩 장면까지. 영화는 이 외톨이 철새가 오랜 쉼표와 도돌이표 여정에도 끝내 분명한 마침표를 찍는 과정을 담아내 다가올 그의 비상을 응원한다.

타쿠야에게.

 

한동안 편지 못 해서 미안해. 누나는 잘 지내고 있어.

 

나는 내가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가족도, 연인도 오래 함께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은 안 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어. 얌전하게, 적당히 웃다 보면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어느 사이엔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관계가 되는 건 불행한 일이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인데, 그 헤어짐이 두려워 누나는 무리했던 것 같아.

 

하지만 만나기 위한 헤어짐임을 이제 깨달았어.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해도 조금도 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누나가 이런 말을 해도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타쿠야는 잘못한 것 없어. 정말 기특해. 누나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왔지만,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곳에서 내 힘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생각이야.

 

타쿠야에게서 용기를 얻었어. 고마워.

 

– 스즈코.

규격화된 사회 속 수많은 경쟁과 관계가 덧없어지고, 주어진 삶의 무게나 수식어가 버거워질 때면 가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 타성인지 생존일지 모를 그 애매한 상황에서 줄다리기하다 보면 이 영화의 몇몇 장면이 떠오른다. 경멸의 시선에 지레 겁먹고 마을 사람들과 료헤이로부터 도망쳤을지라도 전과 사실을 고백하던 스즈코의 부닥침을. 돌고 돌아 동이 튼 순간 새로운 거처를 향해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그의 굳센 표정을.  

 

외톨이 철새처럼 도망치는 삶이라도 묵묵하게 날다 보면 어느 순간 이름 모를 용기가 나지 않겠냐며. 타쿠야는 모를 스즈코의 용기가 또다시 누군가에게로 가닿는다.

230302_한님 보냄.

“백만엔걸 스즈코, 🍑 쉼표, 도돌이표, 그리고 마침표 🍑”의 1개의 댓글

  1. 해가 바뀌고 책임과 의무가 늘어난 지금 대부분의 일들이 어렵고 낯설게만 느껴져 ‘열심히 헤쳐나가야지’라는 다짐을 매번 하지만 처음해보는 일들이 대부분인만큼 실수투성이에 열심히 하지만 결과가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을 때, 저멀리 달려가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면 지금 내 일에 확신이 서지 않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왔어요. 오늘의 여담은 그런 점에서 스즈코에게 많은 공감을 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알을 깨고 단단해져가는 스즈코의 멘탈이 부러우면서도 위로가 되었던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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