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 ❄️ 흔들리는 뿌리에 디디는 삶 ❄️

❄️ 흔들리는 뿌리에 디디는 삶 ❄️

파벨 포리코브스키, 이다

Ojcze nasz, który jesteś w niebie, niech będzie uświęcone Twoje imię,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przyjdź królestwo Twoje,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Bądź wola Twoja na ziemi, tak jak w niebie.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때때로 사람을 결연하게 한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믿음은 자기 자신을 뜻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스스로의 신념, 관계 중의 맥락, 신과의 약속. 자신을 통과한 경험들로 만들어진 이 모든 믿음들에 우리는 머리를 기댄다. 한없이 흔들리더라도 다시 그에게로, 어떤 단단한 뿌리가 내려진 그곳으로 돌아가 안정감을 되찾으려 한다. 매번 다르지만 곧 익숙한 방식으로 되새겨지는 그의 자취는 그렇게 당연해진다. 그리고 어느새 견고해진다.

 

물론, 그 믿음이 결코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흰 눈이 흩날리는 설원의 고요함만큼이나 작은 소리마저 울리는 조용한 성당. 그곳에서 견습 수녀로 살던 안나는 곧 정식 수녀로의 서원식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가 모든 것들이 절제되어 있던 공간에서 나와 뜻밖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쉼 없이 돌아가는 증폭된 환경 속 조우한 한 사람, 자신의 유일한 가족 완다 그루즈. 이 만남의 낯섦이 가시기도 전에, 안나는 완다로부터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럼 유대인 수녀네.”

“누가요?”

“…”

“너 유대인이잖아.”

“…”

“보육원에서 얘기 못 들었니?”

“…”

“네 본명은 이다 레벤슈타인, 하임과 로자의 딸이란다. 우옴자 근처 피아스키가 고향이지.”

하임과 로자, 자신의 부모가 당한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진 안나는 완다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난다. ‘후진’하는 둘의 여정은 개인들의 과거뿐 아니라 폴란드의 역사를 거슬러 오른다. 그 속에서 대부분 안나는 누군가의 말을 ‘보고 있다.’ 참혹한 진실을 하나씩 마주할 때에도, 완다의 조바심과 분개심 그 사이의 감정들을 지켜볼 때에도, 반복된 것은 소리 없는 응시다. 움직임 없이 고정된 카메라가 이 모습을 포착하면 그의 몸에 밴 적막감이 잘 드러나곤 한다. 고요함을 취하는 것, 그것이 안나가 살아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한편 완다는 이러한 적막의 등장에 틈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담배를 피운다. 술을 마시고, 앞장서서 걷고, 춤을 추고 누군가와 잠을 잔다. 그리고 얘기한다. 로자와 하임의 인상이 어땠는지. 50년대 초반 폴란드 신정부의 수립 시절에 왜 ‘피의 완다’로 불렸는지. 알토 색소폰은 어떤 매력이 있는지. 또한 질문한다. 조카의 머리색에 대해서, 욕정의 경험 없이 신께 하는 맹세의 의미에 대해서, 안나와 함께 직면해야 할 답을 위해서도. 이렇다 할 배경음악이 거의 없는 이 영화에서 디제시스 내 유난히 집중되는 소리들은 거의 완다의 것이다. 그는 작은 공백마저도 몰아낸다.

 

그러나 보여지는 장면들이 안나와 완다의 전부를 설명하진 않는다.

동행 중에 두 사람의 뿌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완다와 다투고 거칠게 문을 닫고 나온 안나가 저 밑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나선형의 계단으로 내려와, 파티의 끝자락을 장식하고 있는 연주를 듣는다. 방금까지 본인이 거절했던 그 자리의 한 귀퉁이에서 말이다.

“무슨 노래였어요?”

“존 콜트레인의 곡이요.”

“마음에 들었어요?”

“정말 좋았어요.”

안나가 선택한 순간들이 지금까지 그가 고수해 온 적막을 조금씩 깨트린다. 불안한 떨림 중에 있는 완다에게 어서 가자며 입을 떼거나, 아들의 이야기에 움츠러드는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리사와 팔꿈치를 맞댄 채 작은 대화를 나누고, 슈몬의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를 질문한다. 땅을 파내는 소리가 사방을 울리고 흙 묻은 손으로 기도를 올리던 그날. 그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뒤로 한 채 수녀원으로 돌아왔다.

 

이제 지금껏 멀리하던 것들에 감히 손을 대어 본다. 최소한의 행동으로부터 흘러나오던 신성함이 흐트러지자 자유라는 잡음이 끼어든다. 조용한 식사 시간 중 홀로 터뜨린 웃음과 매일 외우던 주기도문 중에 일관하는 침묵. 입지 않던 옷과 마시지 않던 술, 피지 않던 담배와 취해본 적 없는 잠자리.

 

처음으로 힐을 신고 걷는 모습은 서툴고, 속이 비치는 커튼에 휘말리는 모습은 사뭇 어지럽다. 한밤중 자신이 세웠던 예수상 앞에 서성이다 끝내 손을 모으지 않은 그는 그렇게 자신의 신앙을 유보한 채, 천천히 단정하게 묶여 있던 것들을 풀어 헤쳐버린다.

그런데 완다는 오히려 조금씩 주춤거린다. 담뱃불을 붙이던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슈몬에게 묻는 목소리는 잦아든다. 가족의 유해가 묻힌 자리에 가까워질 때에는 제일 뒤에서 걸어간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간 일상에서 수시로 순간적인 적막에 휩싸인다. 자신의 가족을 사진으로 하나씩 맞춰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다른 잠자리 파트너가 떠난 자리를 보는 눈빛과 목욕 중에 담배를 피우는 얼굴에는 공허함마저 맴돈다.

 

마치 맥이 풀려버린 듯한 모습.

어쩌면 안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필사적으로 밀어내며 생존했을 뿐이다.

 

그가 밀어낸 것은 ‘모험가’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들춰보지 않던 ‘그날’의 진실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차갑게 묻힌 자리. 거기엔 본인을 압도할 상실감과 허탈함이 도사리고 있다. 먼 길이니 금방 깰 거라며 무심히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을 수 있던 그는 더 이상 파헤치지도 떠나지도 못한 채 그 상념을 맴돈다. 그리고 가족의 덧없는 죽음이라는 빈자리를 대체할 것들에 잔뜩 취한 채 지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이는 곧 그의 태도가 되었다.

 

결국 참는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완다의 삶은, 실은 누구보다 내면의 적막에 기민했던 삶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기이한 생의 균형에서 애써 버티고 있다가 모순된 형태의 한(恨)이 풀리자 모든 것을 놓아 버린다. 그 마지막 자리에는 크게 울려 퍼지는 노래와 한껏 젖혀진 문들만이 외로운 여운처럼 남았다.

〈이다〉의 등장인물들이 지닌 공통의 상처, 이 상처는 한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 무자비한 학살로 이어지던 시공간과 ‘동지’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사형을 내리던 인민재판의 잔재에서 비롯된다. 이를 알았던 자는 소란 중에 살아왔고 몰랐던 자는 적막 중에 자신을 정립해 왔다. 이들이 단 며칠 동안 서로를 교차하자 누군가는 자신의 근간의 의미를 잃었고, 누군가는 영위해 온 삶이 무너졌으며, 누군가는 입을 다물고 넘어가고 싶어 했다.

 

다만 영화는 이러한 모습을 갑작스러운 몰락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전혀 달랐던 선택의 엇갈림과 그 속에서 오간 각자의 언행을 묵묵히 담아낸다. 러닝타임 내내 이어지는 4:3의 프레임과 흑백의 명암은 모두가 겪는 아픔을 한데 묶어 조망하고, 여백을 둔 채 진행되다 다가서는 클로즈업은 서로 다른 형태로 요동치는 감정에 집중한다. 이후 마지막 시선은 이다를 향했다.

다시 자신의 수녀 옷을 입은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 이다가 걷는다. 영화 내내 정적이던 카메라가 조금씩 그의 걸음에 맞춰 흔들린다. 그렇게 정처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이제 이 길 위에는 오직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뿐이다.

 

그는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지금까지 믿었던 것들이 흔들렸으나 이다는 흔들린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이제 또 한 번 어딘가에 뿌리내리기를 시도할 것이다. 지금처럼 흔들림을 지나쳐가면서, 마침내 이 여백의 일부를 자신으로 채운 채로.

 

안나는 멈추었지만 이다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온다.

220217_예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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