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마을 다이어리, 🌊 잔멸치덮밥을 먹던, 매실주를 마시던 그날의 기억 🌊

🌊 잔멸치덮밥을 먹던, 매실주를 마시던 그날의 기억 🌊
고레에다 히로카즈, 바닷마을 다이어리

인연(因緣),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의미하는 이 단어를 보면 여러분은 누가 떠오르시나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시큰거리는 애인? 혹은 철없던 과거도 다 기억하고 있는 오래된 친구? 저는 ‘집’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공생하는 제 가족들이 가장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엄마, 아빠, 남동생, 할아버지 그리고 제 반려 고양이 두 분이요. 공생이라는 단어가 여러분께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어요. 저는 엄청 애틋하고 화목한 분위기의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거든요.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는 있지만, 함께 식사했던 때가 언젠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 고양이 두 분의 사진을 공유할 때 비로소 소통하는 그런 무미건조함이 물씬 묻어나는 가족이랍니다.

 

‘가족’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그저 따뜻하고 포근한 안식처로 생각하신 분들도,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서 족쇄처럼 여겨진 분들도 계실 겁니다. 가족 구성원들의 인원, 관계 또한 다양할 거예요. 지금도 혼인, 혈연으로 얽히지 않는 많은 분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모여 함께 일상을 보내고 계실 테지요. 지금 제가 보려는 이들도 색다른 인연으로 가족이 된 경우인데요. 네 명의 여성들이 모여 사는 바닷마을 카마쿠라로 함께 떠나보시겠어요?

 

사치, 요시노, 치카는 바다를 낀 작은 동네 한쪽의 오래된 목조 집에서 살고 있어요. 이들은 취향도 성격도 모두 다르고, 티격태격할 때도 많지만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공유하며 지내고 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5년 전 헤어진 아버지의 부고가 들려와요. 아버지에 대한 추억도 미움도 흘러가는 시간에 바랬는지 여전히 남아 있는지 불분명한 상태로, 이들은 장례식장으로 향합니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셋째 부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둘째 부인의 딸이자 이들의 이복동생인 스즈가 있어요. 울먹거리는 다른 가족과는 달리 스즈는 유난히 긴장된 모습이에요. 사치는 그런 스즈에게 먼저 손을 내밉니다.

“스즈, 카마쿠라에 올래? 우리랑 같이 살래, 넷이서?
우리 집 많이 낡았지만 넓어. 다 일하니까 너 하나 정도 먹여 살릴 수 있어.”
“저 갈게요.”

사치는 단순히 새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스즈가 안쓰러워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걸까요? 어떻게 자신의 가정을 깨버린 여자의 딸에게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어쩐지 사치가 일찍 철이 들어버린 스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첫째인 사치는 아버지의 외도, 부모님의 이혼과 부재를 오롯이 떠안아야 했어요. 어린 요시노와 치카를 돌보는 몫도, 그런 아이들을 홀연히 두고 떠난 부모에 대한 원망도요. 스즈를 통해, 그렇게 홀로 감내해야 했고 더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자신의 기억과 다시 마주한 거죠. 그래서 사치는 어른들의 무책임한 행동들로 상처받고 위축된 스즈에게 자신이 잃어버렸던 어린아이의 삶을 찾아 주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저 장난치고, 행복이든 슬픔이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그런 경험들 말이에요. 둘째 요시노와 셋째 치카 역시 그런 스즈를 한 사람의 딸이 아닌 소중한 동생으로 맞이하죠.

 

스즈 역시 언니들의 삶에 조심스럽게 합류합니다. 스즈는 유부남이었던 아버지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은 언니들과 그들의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스즈는 그저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면 그가 자주 해주던 멸치토스트집을 방문하거나 그의 친구 후타에게 고민을 털어놓곤 해요.

 

점차 카마쿠라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언니들과 가까워진 스즈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강에 다녀온 일, 그와 함께 잔멸치덮밥을 자주 먹었던 일 그리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엄마에 관한 일도 얘기해요.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대신해 사과하기도 하고, 유부남을 만나던 사치를 위로하며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다시 돌아보기도 하죠. 그렇게 조금씩 스즈는 자신의 기억과 감정 표현에 솔직해지며 열다섯의 나이를 되찾아갑니다. 어른들이 남긴 상처를 소중한 언니들과 함께 직면하고 보듬으면서요.

“엄마에 관해서 얘기해도 돼.”
“응.”
“여기가 네 집이야. 언제까지나.”
“응, 여기 있고 싶어. 언제까지나.”

그렇게 스즈는 사치, 요시노, 치카와 진정한 가족이 되어갑니다. 쌀쌀해진 어느 가을날 그는 요시노 언니를 앞장서 기차역을 향해 달려가기도, 골을 넣은 기념으로 치카와 함께 매실주를 마시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하죠. 또 벚꽃이 만개한 날 언니들과 신발을 손에 쥔 채 바다를 걷기도, 쏟아지는 햇빛을 뒤로한 채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매실로 술을 담그기도 해요. 이런 일련의 시간 속에서 네 자매에게 아버지의 핏줄과 어머니의 다름은 중요치 않아요. 이들은 그저 집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밥을 먹고, 울고 웃고, 자신의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추억을 겹겹이 쌓아갈 뿐이죠. 오히려 영화는 부모와의 연보다 자매로 만난 이들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이를 보니 가족이란 출생과 계약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그저 한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하고 관계를 지속해가는 ‘과정’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때 먹은 음식, 함께 바라본 산 아래의 풍경,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바닷모래의 촉감이 하나둘 겹쳐집니다. 그렇게 포개진 세월은 먼 훗날 누군가가 카마쿠라의 집을 떠나더라도 그 사람의 취향이나 습관으로 오래도록 남아있을 거예요. 스즈와 사치도, 요시노와 치카도 잔멸치덮밥을 먹을 때나 매실주를 마실 때면 그 시절을 그리고 서로를 기억할 테죠. 여러분도 오랜만에 가족이나 오래된 인연들과 따뜻한 밥 한 끼를 드셔보시는 건 어떨까요? 서로 닮아있는 것을 찾아보고 그 이유를 돌이켜보면, 그 사람과의 인연 또한 반추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거예요.
211111_한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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