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의 지름길, 🔫 그런 길잡이는 필요 없다 🔫

🔫 그런 길잡이는 필요 없다 🔫

켈리 라이카트, 믹의 지름길

최근 영화관에서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린 일이 있었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 나비족의 일원이 된 제이크 설리가 ‘판도라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그들의 언어를 영어처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순간 모든 주인공이 마법처럼 영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있지도 않은 언어로 영화를 채우는 비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비영어권 관객이 외화를 관람할 때 겪는 고충을 간편하게 치워놓는 그 한마디의 언어 권력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이를테면 비영어권 인물의 전기 영화나 시대극에 당연하게 영어가 쓰이는 것은 단순히 할리우드가 미국에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권력을 갖는지에 따라 각자의 관람 경험은 완전히 달라진다.

 

제작에 드는 막대한 자본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비용 절감을 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어쩔 수 없는’ 선택들이 영화를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예술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본을 빌미로 권력이 개입할 틈을 내어주면 영화는 쉽게 선전의 수단 혹은 검열의 대상이 된다. 할리우드 히어로가 국가 이념의 상징이 되거나 패권주의 위에서 성립하는 것처럼, 반공 이념을 강요받던 6~70년대 한국영화가 검열로 얼룩진 것처럼.

 

그래도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영화는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인종차별적 내용으로 비판받았던 서부극에서도 이런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장르를 넘나들며 도사리는 위험 속을 떠도는 철새들을 그려온 켈리 라이카트의 서부극은 장르 특유의 마초성을 전복하고 관습을 깬다.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남성에게 총구를 겨누는 에밀리가 ‘철새’를 열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서부극은 본래부터 떠돌이들의 이야기였다. 금맥을 찾아 여정에 나선 사람들,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총질하는 무법자, 또는 ‘인디언’에 맞서 마을을 지키는 정의로운 보안관. 정통 서부극은 주로 백인인 카우보이를 선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을 악이자 공동의 적으로 설정했다. 원주민을 미개하고 우매한 존재로 보이게 하고 소위 문명에 복속시키는 내용은 미국인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서부 ‘개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서부극은 정치적 상황과 시민의식에 따라 변화를 꾀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감독이 현대를 배경으로 서부극의 문법을 차용하거나 전형을 비트는 등 장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믹의 지름길〉 속 서부에 정착하려는 세 가족도 길을 잃고 사막을 떠돌고 있다. 이들은 ‘인디언’으로부터 안전한 길을 안다고 나선 안내자 믹이 의도적으로 정착을 방해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설상가상으로 물이 바닥나고 있어 죽음을 맞을 위기에 처한다. 이야기는 1845년 스테판 믹의 안내로 오리건의 사막을 지나던 200여 가족이 죽음의 위협에 놓였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데, 제목 ‘믹의 지름길’은 이를 바탕으로 이름 붙여진 지명이기도 하다.

 

정통 서부극에서 ‘인디언’은 백인의 땅, 혹은 백인의 땅이 될 곳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었기에, 그들의 언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속 인물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마실 물이고, 물을 얻으려면 그들이 생포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안내를 받기엔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믹이 그를 죽이려 하고 일행을 한심하게 여기며 여정은 더욱 불편해진다. 반면 에밀리는 자신들의 문명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최소한 그를 인간으로 대한다. 식사를 남겨 건네고, 오랜 여정에 떨어져 버린 신발을 기워 주기도 한다. 관찰과 표정과 몸짓에 의존하는 에밀리의 대화는 영화 제목의 ‘지름길’이 ‘shortcut’ 대신 단절을 의미하는 ‘cutoff’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단절적인 믹의 방식과는 대조된다.

 

허언만 늘어놓고 무작정 원주민은 위험하다는 믹이 못마땅한 에밀리는 그에게 논리정연하게 맞서거나 자신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다. 계속해서 충돌하는 둘 사이의 긴장감은 영화 중반 서로에게 총을 겨눌 때 극에 달한다. 이동 중 에밀리의 마차가 완전히 망가져 짐을 수습할 때, 원주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에밀리의 물건을 구경한다. 믹은 에밀리가 괜찮다는데도 ‘지켜야 할 선’을 운운하며 그를 쏴 죽이려 하고, 그런 믹을 막기 위해 에밀리는 총을 겨눈다. 나머지 사람들은 숨죽인 채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발포가 유예된 이 순간마저 영화의 느린 리듬을 따를 때, 관객은 이 셋을 지켜보는 영화 속 인물들과 같은 종류의 긴장감을 느낀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전개에 지연(suspend)이 이루어질 때 느끼는 긴장감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예기치 못하게 폭탄이 터진다면 관객의 충격은 폭발 직후 잠깐이겠지만, 누군가 책상 밑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음을 관객만 알고 있다면 폭탄이 터지는 순간까지 긴장감이 유지될 것이다.

 

반면 이 장면에서 서스펜스의 근원은 ‘알지 못함’에 있는데, 부족어를 알지 못하는 이상 관객은 등장인물과 동일한 양의 정보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자막이 삽입되지 않은 영화에서 낯선 타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이는 전능한 관객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영화 밖에서는 언어 권력을 가질지라도 이곳에서는 그저 이 낯선 자를 살피며 믹 또는 에밀리의 입장을 취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무엇을 선택하든 영화는 보증해 주지 않기에, 관객은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상황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가로막는 요소는 영화의 형식에도 존재한다. 적요만이 가득한 라이카트의 사막이 품은 고독은 기존의 서부극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졌다. 4:3 비율의 화면에 욱여넣은 광활한 미 서부의 풍경은 좀처럼 클로즈업되지 않으며, 인물들을 지켜보는 클로즈업 화면은 양옆이 잘린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익스트림 롱 숏으로 편집 없이 느릿하게 제시되는 이동의 모든 과정을 관조하게 만들 때, 화면이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천천히 디졸브가 이뤄질 때, 관객의 편안한 관람은 방해받는다.

 

그 답답함과 불편함 속에서 영화가 질문하는 것은 그간 관객이 쉽게 취해 온 편리함이다. 지루할 틈 없는 편집과 생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미장센이 숨기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일부 관객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한때 이분법적 구도로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했던 장르에서 라이카트의 미니멀한 화면이 제공하는 여백은 그 편리함을, 혹은 그 편리함에 안주해 온 우리를 사유할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

결국 원주민은 지금 이 방랑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살아있는 나무를 선물한다. 그를 다 안다고 자신했던 믹–내지는 정통 서부극–의 오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무 사이로 조금씩 멀어지는 원주민을 에밀리가 바라본다. 그들의 ‘문명’은 그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순간 얼마나 무용해지는가.

 

영화는 에밀리의 선택이 이 방랑자들을 그들의 에덴동산에 데려다 주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가 제기한 여러 질문의 답 역시 잡힐 듯 말 듯 멀어진다. 무엇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가. 원점에 선 관객은 무엇을 보고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 그 답을 찾는 여정은 이 장면의 목격자인 관객의 몫이다. 아마 정착할 곳은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어딘가를 떠도는 서부극의 철새들처럼.

230202_성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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