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 펑 하고 터진 마음이 만날 때 🍫

김윤석, 〈미성년〉

키가 크고 스무 살 성년이 된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등학생 딸이 아빠의 불륜 현장을 훔쳐보면서 시작되는 영화 〈미성년〉은 배우 김윤석의 첫 연출작이다. 거친 남성성이나 담담한 부성을 연기해온 그의 필모그래피로부터 전형적인 아버지를 주축으로 한 식상한 가족 이야기를 예상해 볼 수도 있지만 방심은 금물. 담백하고 섬세한 캐릭터 설정으로 두 고등학생의 우정과 사랑이 빛나는 영화다.

🍓 펑 하고 터진 마음이 만날 때 🍫

지금껏 미디어는 (정상)가족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수없이 제시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가정에서, 교실에서, 학원에서, 운동장에서 얼마나 많은 병든 원망이 오가는지 안다. 이런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면 두 가지 마음이 든다. 원흉을 찾아가 엉덩이를 흠씬 차주고 싶고, 반대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아 보고 싶다.

정용준의 『내가 말하고 있잖아』와 〈미성년〉을 살며시 붙여 보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작품 모두 가족에 관한 불편한 사실을 꼬집으며 가정 밖에서, 교실 안에서 맺는 새로운 마음을 들여다본다. 작가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따뜻한 치유의 과정을 목격하고, 이는 작품 안팎 모두에게 성장의 밑바탕이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유사)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누군가가 저버린 책임을 가만두지 않고 손 내밀어 주는 ‘스프링 언어 교정원’과 ‘딸기초코’에 흐르는 공통의 마음을 읽고 싶었다.

‘어른스럽지’ 않은 성년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동급생 윤아와 주리는 원망으로 묶여 함께한다. 이들은 눈 질끈 감으면 모른 척 살아갈 수 있었던 문제를 소매 걷어붙이고 대면한다.

“아줌마 남편이 우리 엄마랑 바람났어요. 근데 우리 엄마 지금 임신했거든요. 알고 계시라구요.”

당돌한 고등학생의 폭로로 대원과 미희의 불륜은 두 사람만 모르던 비밀에서 공공연한 사실이 됐다. 윤아와 주리는 각자의 엄마와 아빠가 벌인 일 때문에 이제 좋든 싫든 붙어 다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윤아는 엄마 뱃속의 “딴 애 아빠” 아들을 지워 버렸으면 좋겠고, 주리는 엄마 모르게 조용히 이 일을 넘어가고 싶은 눈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부딪친 옥상에서의 입맞춤처럼,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미성년〉은 존재 자체만으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사람들이 (아버지들 때문에) 이미 벌어진 사고를 수습하면서 나아가는 이야기다. 비록 그 시작은 엿보기와 도망치기, 입술 박치기와 머리채 잡기였을지라도.

뭔데 그래. 둘이 싸웠어?

싸웠다.

“엄마도 내 말 들어”라는 말에 미희가 아들이라 든든하다는 속 편한 말만 해서, 애타게 아빠를 불러도 대원이 뒤도 안 돌아본 채 차를 타고 떠나버려서, 그 둘이 바람이 나서 싸웠다. 어른들이 망쳐놓은 판에 말려들었을 뿐인 윤아와 주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아등바등하지만 사건의 원인인 어른들은 이 분투를 그저 두 미성년의 다툼으로만 본다.

부모들의 무관심과 어른들의 부주의함으로 한숨이 나올 때 윤아와 주리는 학교에 소동을 일으킨다. 싸우고 싶으면 싸워야지 어쩌겠는가. 복도 창문이 깨지고 교실 문이 부서질 정도로 과격한 액션 신 이후 두 사람에겐 소란스러운 교실과 대비되는 정적이 찾아온다. 마음을 콕콕 찌르고 신경을 거스르던 감정을 솔직하게 터뜨려버리고 나니 오히려 차분해진다. 교실 바닥에 쓰러져 마주한 눈에 흐르는 고요함에선 일종의 전우애까지 읽힌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덕향 김사장’에게서 온 문자를 허겁지겁 삭제하는 대원의 손가락이다.

싸우지들 마. 너희들이 왜 싸워?

그래서 극중 어른들이 뱉는 걱정이나 조언은 공허한 말조각이 되어 초라하게 떨어져버린다. 이 영화의 ‘성년’들은 도무지 책임지려고도, 적어도 솔직해지려고도 하질 않는다. “니네 이러면 나중에 큰일 나”라는 속 빈 호통에 “거짓말” 한 마디를 툭 던지고 학교를 벗어나는 주리가 통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진짜 싸워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의 빈자리엔 윤아와 주리의 고군분투가 있다. 속 좋게 외제차 카탈로그나 보다 어디론가 도망쳐 버린 대원과 산모수첩은 열심히 썼으면서 ‘못난이’ 한 번 들여다보러 오지 않는 미희가 답답한 두 주인공은 인큐베이터 속 작은 생명을 위해 대신해서 고민한다. 요만했는지, 이만했는지. 학교를 관두고 아기와 독립할 수 있을지, 입양을 보내는 게 교육 환경에 더 좋지 않을지. 인큐베이터에서 사라진 아기는 어디로 갔을지.

그 모든 순간에 어른들은 없다. 미희가 입원한 병원에 같이 가봐야 하는지마저 학생에게 묻는 선생님은 덤이다.

싸웠대?

안 싸웠다.

남편과 바람난 그 여자가 어떻게 살고 있나 찾아간 오리집에서 영주는 남편임이 분명한 상대와의 전화를 듣다 못해 식당을 벗어난다. 뒤따라온 미희는 영주를 위하는 척하는 말로 속을 긁는다. 이제 ‘뻔뻔한 상간녀’와 ‘억울한 본처’의 싸움이 이어져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두 딸들이 대신한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너무 유약하고, 순진하다. 오지 않을 남자에게 전화로 어리광 부리는 상황에, 집문서와 통장이 모두 ‘권대원’ 앞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속상할 뿐이다.

미희와 영주는 대원을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상처받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일부러 서로에게 상처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미성년〉의 관심은 불륜 치정극을 그리는 게 아니라 이미 망해버린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들이 피어나는지 살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중심 사건에서 두 아버지를 치워 놓는다. 딸의 나이도, 신발 사이즈도 제대로 모르는 영민과 대원은 영화에서 간간이 터지는 실소를 유발하는 인물들이다. 미성년자인 딸에게 신용카드 하나 만들라고 하질 않나, 돈 뺏어서 커피 마시고 거스름돈은 챙기질 않나, 병원에서의 모양 빠지는 추격 신까지. 자꾸 도망만 치는 아빠들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서해 끝까지 도망간 대원이 동네 양아치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차마저 빼앗기며 당한 응징은 그만 도망치고 자리로 돌아와 마저 책임지라는 통쾌한 멱살잡이다.

한편 투닥투닥 다투다가 엄마 잘 보라고, 너네 엄마나 신경 쓰라고 얹는 한 마디는 쉽게 묻어두고 모른 체하는 엄마의, 자신의, 가족의 상처를 들여다보자는 응원과 다짐이 된다.

어떤 문제는 집안이 지옥이 되고 나서야 보인다.

한 줌도 안 되네.

아주 작았으니까.

납골당에 둘 걸 그랬어.

그 속에 있으면 더 외로울 거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난 나를 못 믿어.

나도.

이 영화에서 가장 야심찬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은 두 미성년의 대담함과 발칙함이 빛나는 장면이다. 이들의 ‘딸기초코’는 떠안은 의지를 녹여낸 객관적 상관물이다. 암기과목이 진짜 약한 주리와 사실로 돌대가리인 윤아가 ‘못난이’를 기억하는 방법이다. 납골당에 찾아가겠다는 (나도 못 믿을) 약속이 아닌 절대 까먹지 않겠다는 맹세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작은 생명을 다정하게 들여다보려는 마음이다.

누구나 주어진 몫의 책임이 있고 우리 그 정도는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나. 모양 빠지게 뒷걸음질로 도망가지 말고.

230413_세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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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주면 좋지 않다. 누구든 어떤 이야기든 오래 들으면 결국 다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된다. 알게 되면 아는 만큼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만큼 괴로워진다. 그 사람을 걱정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선 사랑하게 되고 반대로 미워하게 된다.”

_정용준, 『내가 말하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