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것처럼, 💣 거짓의 도시에서 파국의 드라이브를 💣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에 빠진 것처럼〉

고향과 전공이 같은 여대생을 집으로 불러 외로움을 달래려는 노교수 ‘타카시’, 자신을 기다리는 할머니는 만나지도 못한 채 할아버지뻘의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아키코’, 애인의 비밀에 대한 의심이 집착이 되어 버린 ‘노리아키’의 불편한 삼자대면. 모두가 사랑을 외치지만 ‘진짜’는 없는 대도시의 하루가 위태롭게 흘러간다.

💣 거짓의 도시에서 파국의 드라이브를 💣

가보지 않은 곳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세계일주’를 주제로 이곳을 선정한 후 줄곧 묘한 부담감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알고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감독 역시 도쿄 출신이 아니니, 내가 그곳에 아직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보기엔 오히려 적절한 제약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란 감독의 일본 영화. 다소 낯선 조합이지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은 애초에 전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초기작 중 다수는 ‘어린이 영화’였고, 1990년대 이후로는 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을 찍었다. 2000년대에 들어 그는 더욱 미니멀하고 담대한 영화적 실험을 이어갔다. 차 안에 카메라 하나를 놓고 열 명의 손님을 만나는 〈텐〉(2002)이나, 오즈 야스지로를 기리며 다섯 개의 롱테이크로만 구성한 〈파이브〉(2003), 그리고 연극을 관람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성 114명의 얼굴만으로 채워진 〈쉬린〉(2008)까지.

흥미로운 것은 디지털 영화로의 이행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 혁신적인 작품들 이후 그가 극영화로 회귀했다는 점이다. 앞서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배경으로 〈사랑을 카피하다〉(2010)를 성공적으로 찍어낸 키아로스타미는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촬영했다. 해외 제작이라는 새로운 시도는 2000년대 이후 점점 심해지는 이란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아이디어는 약 20년 전부터 도쿄를 자주 방문하며 생긴 것이었으며, 본인의 인물들이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는 감독의 의도 역시 있었다.

언뜻 〈사랑을 카피하다〉와 비슷해 보이는 제목은 의도된 것으로,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모호한 화술로 관객에게 물음표를 남긴다는 점도 유사하다. 가정법의 제목을 그대로 따르는 듯한 〈사랑에 빠진 것처럼〉의 유보적 문법은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를테면 딥포커스로 분주한 바 안을 비추는 오프닝 시퀀스는 “거짓말 아니야”라는 대사로 시작하지만, 그 말을 하는 여성의 모습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디제시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의가 분산되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처해진다. 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의 시야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또한 화면 속 많은 이들 중 하나일 뿐일까.

이미지만큼이나 흔들리는 건 관객의 도덕적 잣대이다. 시작과 함께 들려오던 실랑이의 주인공 아키코는 남자친구 노리아키의 과도한 집착에 시달린다. 카페에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바닥의 타일 개수를 세어 보라는 그의 말은 즉각 관객을 경악게 한다. 그러나 노리아키의 의심이 고급 바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며 돈을 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아키코의 거짓말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때, 관객은 마음 편히 아키코의 편에만 설 수도 없다.

그날은 고향에서 할머니가 자신을 보러 온 날이었지만, 애인까지 뿌리친 아키코는 사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중요한 고객을 만나러 가야 했다. 택시 안에서 자신에게 남긴 할머니의 음성 메시지를 듣던 아키코는 결국 전철역에 들른다. 우두커니 서 있는 할머니를 보기 위해 로터리를 빙빙 돌 때, 아키코의 시야를 공유하는 관객은 도로의 차들에 가려 할머니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렇게 만나러 간 상대가 할아버지뻘의 남성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속 시커먼 노인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배가된다.
하지만 관객의 예상은 또 한 번 빗나간다. 이런 관계들이 으레 그러하듯 돈으로 아키코의 성적 매력을 취하려 했을 것이란 예측이 무색하게, 노인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여자를 들이는 것 아니냐는 말에 발끈하거나 아키코가 난처해지자 할아버지라는 거짓말에 가담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흔한 성구매자와 판매자의 관계를 원한 것은 분명 아니다. 마냥 비난 어린 시선으로만 그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아키코의 환심을 사려 하지만 오히려 무시당하는 듯한 모습에선 모종의 측은지심마저 든다.
 
타카시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는 노리아키도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 앞까지 찾아와 시험을 보러 가야 하는 아키코를 집요하게 추궁한다. (아키코의 할아버지인 줄 알았던) 타카시에게 털어놓는 고민을 들어보면 그가 결혼을 원하는 이유는 단지 결혼하면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권리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가 나면 참지 못하고 폭력을 쓰기도 하는 그는 연인 관계를 소유와 종속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키아로스타미가 그리는 도쿄는 오리지널리티가 사라진 공간이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있다고 믿고, 그 돈을 위해 ‘사랑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직업이 될 수 있는 사회. 바디우의 말처럼 사랑이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경험”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하겠다는 결심에는 기꺼이 자아를 깨뜨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초월성도, 위반도 없는 동일자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사랑은 “소비와 쾌락주의적 전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기대로, 혹은 어떤 기대도 갖지 않게 된 채로 불 켜진 수많은 간판 중 하나에 들어앉아 밤을 보낸다. 처음 본 사람에게 지나간 사랑을 한탄하기도, 평생 알아온 사람처럼 갑자기 마음을 주기도 한다. 거짓말과 허구를 근간으로 엮이는 관계들 속에서 아키코를 보살피는 타카시의 마음이 얼핏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현대의 도시. 이것이 도쿄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은 도시와 그 속의 사람들이 그만큼 몰개성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쿄의 밤거리를 빛내는 저 수많은 다국적 체인처럼 말이다.

타카시의 집을 방문한 아키코의 대사는 원본과 모방에 대한 영화의 질문을 함축한다. “누구를 닮았다는 말을 듣지 않는 날이 없다”는 아키코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사진이나 그림들을 가져와 자신과 닮지 않았는지 묻는다. 야자키 치요지의 ‘교무(教鵡)‘, 타카시의 아내 사진, 그리고 타카시의 딸 사진. 무엇을 모방하느냐에 따라 아키코는 그에게 그림 속 여인처럼 감상의 대상이 될 수도, 배우자에게 받았어야 할 사랑을 연기할 수도, 딸에게 받고 싶었던 관심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 속의 앵무처럼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모방이기에, 진정한 관계에서만큼 그의 욕망을 충족해 줄 수는 없다.  

결국 다큐와 픽션을 오가는 형식이나 진실과 허구를 오가는 인물들을 통해 〈사랑에 빠진 것처럼〉은 과연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진짜’라고 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하루 남짓 동안 오가는 수많은 감정은 인물들이 지키려는 자기동일성은 미약하고, 타자와의 관계맺음에는 끊임없는 부딪침과 깨짐이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의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해 니코 바움백은 사랑에 할리우드식 깔끔함(‘The End’)을 바란다면 폭력만이 가능한 결말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한다. 그의 말대로 관계와 깔끔함은 좀처럼 함께하지 못한다.
 
타카시가 아키코에게 한 말처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싫어도 삶은 계속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에 이르기까지, 방식은 매번 달랐지만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집요하게 담아온 것은 삶의 미결정성 앞에 놓인 인간이다. 그들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어쨌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고 미지의 세상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신을, 타자를, 미래를 조금 덜 속이는 것뿐.

Qué será, será / Whatever will be, will be / The future’s not ours to see

무엇이 일어나든, 되든 간에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230831_성하 보냄.

[참고문헌]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Nico Baumbach, 「Like Someone in Love: On Likeness」, 『The Criterion Collection』.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3170-like-someone-in-love-on-lik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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