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도추한, 🚲 외로운 언어들의 고향 🚲

허안화, 〈객도추한〉

홍콩의 역사를 기록해 온 허안화 감독의 반자전적인 영화 〈객도추한〉은 엄마의 고향인 일본을 방문한 후이옌이 엄마를 이해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모녀 관계의 갈등과 화해, 전후 동아시아사에 대한 회고, 식민지와 이주로 인한 정체성 고민을 다루는 이 영화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들의 노래이다.

🚲 외로운 언어들의 고향 🚲

💿 梅艷芳 – 秋天復秋天 (매염방 – 가을 또 가을)

후이옌과 아이코는 서로의 궤적에서 언제나 객(客)이었다.

중일전쟁으로 혼란한 시기 일본에서 만주로, 마카오로, 홍콩으로 흘러가듯 살아온 아이코는 일본을 적대시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말 한마디 편하게 하지 못하며 지냈다. 시부모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고 딸 후이옌에겐 무서운 엄마가 되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후이옌은 조부모와 더 가까워졌고,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건너간 뒤에도 (홍콩 청년 대다수가 그랬듯)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엄마와는 더욱 멀어졌다.

도무지 함께할 수 없었던, 소통이 불가능한 먼 거리. 모순적이게도 그 거리가 후이옌과 아이코를 이어 주는 길이 되었다. “언니가 엄마랑 제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제일 가까워”라는 동생의 말처럼, “친할수록 멀고, 멀수록 친한 것 같아”라는 아이코의 말처럼. 후이옌이 아이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몸과 마음이 아주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이옌은 일본어를 못 해야만 하고, 아이코가 자신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야만 한다. 언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실패는 이들이 가진 공통의 디아스포라 경험을 극대화하는 고백이다.

고향을 등진 외로움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불안감으로, 후이옌과 아이코가 삶에 적응하는 방식은 유사했다. 어느새 홍콩의 음식과 문화에 익숙해진 아이코는 떠나온 일본의 친구들이나 옛사랑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며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음에 안도한다.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하고 런던의 친구들과 행복하게 지내며 홍콩과 가족 문화에 어색한 후이옌은 영국 방송국에 취업해 위안을 얻고자 했다.

“후이옌, 엄마랑 홍콩 가자.”

후이옌은 엄마와 일본으로 향한다. 그 길에는 20세기 동아시아사가 흐르며,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개인사가 놓여 있다.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후이옌과 아이코가 지나온 길을 동시에 되짚는다.

만주에 있다가 중국군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이코는 만주에서 마카오, 홍콩으로 이동하다 일본으로 돌아간다. 마카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홍콩, 영국으로 이동한 후이옌은 홍콩으로 돌아가고, 후이옌의 조부모 역시 중국에서 마카오로 이주해 오랫동안 지내다 광저우로 돌아간다. 어딘가에 소속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고향을 그리워하다 불완전한 복귀를 완성하는 것. 이것이 후이옌 가족의 역사이자 홍콩의 역사였다.

출발지와 경유지가 있을 뿐, 도착지가 없어 보이는 삶의 궤적은 자전거, 배, 기차 등을 타고 정박 없는 이동을 계속하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벳푸에서 자전거를 타다 길을 잃은 후이옌이 일본인들에게 둘러싸여 듣는 말은 “왜 중국인이 여기 있지?”였다. 물론 후이옌은 이 말 역시 알아듣지 못한다.

자전거를 타고 벳푸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던 후이옌은 숲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다 발견한 작은 집 앞에서 토마토를 따는데, 이윽고 집주인이 뛰쳐나와 “ほら!死にたいのか!そのトマト止めとけ!” 라며 소리친다. 깜짝 놀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로부터 도망치는 후이옌은 자전거마저 버리고 황급히 줄행랑친다. 뒤에서 들려오는 “止まれ!”, 꽤나 긴박한 추격, 그리고 허무한 붙잡힘. 사실 집주인은 농약을 잔뜩 쳐 둔 토마토를 후이옌이 먹을까 걱정되어 쫓아온 것이었다. 낯선 외국인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후이옌의 귀가를 돕는다. 극심한 공포와 따뜻한 안도가 공존했을 찰나의 아이러니, 가을의 일본에서 길을 잃은 후이옌은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 잘 외웠다. 할아버지가 사탕을 주마. 그렇게 매일 외우면 근본을 잊지 않을 게다.”

1947년 만주 안산에서 태어난 허안화는 마카오에서 조부모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고 1952년에 홍콩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가까이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인으로 받아들였을 어린 허안화는 분명 일본인을 욕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16세가 되어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1975년 동생이 결혼하면서 일본에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과 자신의 이주 역사,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담아 만든 영화가 〈객도추한〉이다.

1974년 런던 영화학교에서 학업을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온 허안화는 길 위의 홍콩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왔다. 방송국 제작부에서 만든 초기 작품에서는 평범한 홍콩 사람들의 난민, 이주, 시위 등의 이야기를 다뤘고, 〈호월적고사〉와 〈투분노해〉에서는 주윤발과 유덕화를 베트남 난민으로 등장시켜 홍콩 영화의 가능성을 베트남까지 확장했다. 홍콩 민주화 운동과 “사회의 이상주의자”들을 보여주고자 한 〈천언만어〉나,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이민자들이 모인 도시 틴슈와이에 끌려 만든 〈틴슈와이의 낮과 밤〉과 〈밤과 안개〉까지 허안화가 만든 영화들은 그때의, 지금의 홍콩을 기록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수많은 사연이 모이는 홍콩의 길 위에 선 허안화의 작품세계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의지해야 했던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단순히 작품을 완성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삶을 구성해 내는 과정의 일부였으며, 〈객도추한〉 속 후이옌에게는 일본에 다녀온 후 홍콩 방송국에 취업하는 일이 그 과정이었다.

“근데 엄마는 나처럼 해탈할 기회가 다시 있을까?”

아이코는 딸에게, 후이옌은 엄마에게 배신당한 셈이었다. 시대가 그렇게 안내했고, 국가가 그렇게 내몰았다. 그리고 중국군을 사랑해 만주에 남아 결혼하겠다는 결심으로, 혹은 엄마가 일본인이었음을 알게 되고도 홍콩 집을 나온 선택으로 그렇게 나아갔다.

후이옌이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는 말을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남편이 일찍 죽고, 큰딸이 유학을 가고, 막내딸이 결혼 후 캐나다로 떠나자 홀로 남은 아이코는 비로소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전쟁 중”인 가족에겐 환영받지 못하고 살던 집도 팔게 되어 돌아갈 곳이 없다. 그는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광둥어로 마지막 인사를 전한 뒤, 안개 너머 홍콩으로 돌아간다.

그러고 보니 〈객도추한〉은 가을의 여행길에서 한(恨)을 푸는 영화였다. 후이옌의 해탈이 가족과 홍콩 역사의 고백으로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3년 영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던 후이옌에게 베트남, 중동 전쟁은 TV에서만 접하는 낯선 곳이었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떠난 일본 여행길에서 마주한 갈림길 위, 그는 집도 고향도 아닌 낯선 환경이자 물리적 집뿐이었을 홍콩으로 돌아가고자 마음먹는다. 런던의 다리 앞을 지나는 자전거와 벳푸의 숲길을 헤매는 자전거, 그 둘을 이어 주는 홍콩의 다리와 1997년의 홍콩을 떠올린다.

후이옌은 영국도 잊고, 광저우로 가는 것도 잊고 홍콩 방송국에 취업했다.